조각글

여러 차례 대죄식자를 토벌하고 난 이후 모험가의 몸은 급격하게 쇠하기 시작했다. 툭하면 갑자기 나타났다가 제 기분대로 사라져버리는 아씨엔의 원형이라는 자가 수정공에 대해 떠보는 말을 처음으로 했던 때도 그 즈음이었다.

너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놈을 믿을 수 있어?

그게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네 눈에는 나나 수정공이나 '완전한 자'가 아니잖아. 그런 것들의 외모따위 딱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모험가의 말에 에메트셀크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얘기가 아닌 거 알면서. 중요한 건 그놈이 너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에 비하면 나는 어떻지? 숨김 없이 모든 걸 알려주고 있잖아? 그러고는 모험가가 무어라 대꾸도 하기 전에 아씨엔은 종적을 감췄다. 에메트셀크의 말이 맞기는 했다. 한밤 중 몸이 괜찮냐며 모험가를 찾아온 수정공은 여전히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그럼에도 수정공은 모험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모험가는 등을 감싸는 거주관의 부드러운 이불보를 만지작거리며 그의 배려와 섬세함을 말 그대로 피부로 느꼈다. 태도가 어떻든 수정공은 진심으로 모험가에게 열과 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 진심이 모험가 개인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반역을 멈추지 않는 그와 그의 도시. 그리고 주민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험가는 곧 잡념을 멈추고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 채비를 한 후 거주관을 나섰다.

모험가는 수정공을 좋아했다. 그의 정체를 그라하 티아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그에게 연정을 품기 시작한 건 제 1세계에 오고 난 이후였다. 물론 세계를 구하는 일이 한시가 바빴기때문에 조용히 묻어둔 마음이었다. 제 1세계에 오기 전 자신은 모험 중에 누명을 쓰고 쫓겨다니거나 오랜 시간 최전선에서 싸우기를 전전했다. 따라서 개인적인 보살핌을 받는 일이 너무나 오랜만인지라, 너무도 쉽게 그를 사랑해버렸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라하 티아, 아니, 이제는 수정공인 그가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과 배려가 분명 개인적인 호감 때문이 아님에도 모험가는 그를 좋아했다. 이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한시가 급한 시기에 필요에 의한 친절과 배려를 받고는 그를 연모하게 되었다. 그의 속내를 여지껏 모르면서도 마음이 동해버린 자신을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속내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정체 역시 모르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그라하 티아라고 밝힌 것이 아니니 대외적으로는 소중한 옛 친구인 그를 몰라봐야 했다.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했지만 역시 속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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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공은 그저 모험가 개인에게 호감을 가져 이 거대한 계획을 구상한 것이 아니다. 세계에 닥친 재앙이 너무나 끔찍하고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 제 1세계의 유일한 원초세계 사람인 자신의 존재가 주책맞게도 외롭다고 느껴질 때, 영웅을 생각하며 버텨냈지만 이는 계획을 수행하는 도중의 개인적인 사색일 뿐이었다. 세계를 구하는 일을 영웅이 해낸다면, 그 일을 돕는 역할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내 것이어야 해. 존재만으로 희망인 영웅을 지켜내는 것. 닿을 수도, 될 수도 없는 영웅을 위해 그라하 티아가 스스로 정한 목표였다. 수정공은 모험가 개인에게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순수한 야망을 가진 인물이다. 그 열망은 타워에 스스로 깊은 잠에 빠져들 때처럼 말갛다. 100여년이 지났음에도 어려서부터 영웅을 동경했던 소년의 마음은 지금도 같다. 그라하 티아가 모험가에게 특별히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의 인류애 때문이다.

수정공은 모험가를 지키고 1세계의 빛을 전부 가지고 죽으려했다. 모험가는 수정공이 무모하게 자기희생을 하게될까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노아시절부터 그를 지켜본 모험가는 그가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그렇게 했음을 알고있다. 따라서 그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정말 슬프겠지만, 그가 미워지겠지만, 이해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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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아니 나의 평생보다 길었을 세월을 살아간다는 일은 어떤 감각일까. 툭하면 남의 기억을 곧잘 보게 되는 나로서는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감각이다. 한때 알고지냈던 그가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건 놀랍지 않았다. 놀라웠던건 그 행위의 원동력이 나였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기억해주어서 고마워. 나 머리 나쁘니까 과거를 연구해서 이전에 없던 일을 이루는게 멋있어 보였어. 네 덕에 미래는 바뀐거야. 수정공은 깊은 잠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탑에서 평생 자야할 잠을 다 자버려서인가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남들에게 없는 그 길고 긴 밤을 보내며, 자신의 출신지에 대해 생각했을까? 내가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한때의 모험을 추억했을까.

모험가가 기억하는 자신의 일생은 ...까지로, 수정공의 일생과 비교하면 티끌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 모험가의 전 생애를 통틀어도 별반 차이는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티끌에서 조금 더 알갱이가 굵은 모래알 정도. 모험가는 수정공이 어떻게 그렇게나 오래 자신을 기다리기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려 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곧 그만 두었다. 이제와서 어떤가, 하고는 괜히 자신의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턱없이 짧은 기억하는 순간에도 미안하게, 수정공이 아닌 이전 세계의 그의 모습은 모험가에게 그다지 인상 깊게 남아있지 않았다. 모험가의 인생에는 크리스탈 타워 사건에 준하는 많은 굴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라하 티아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당연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며 깊은 잠에 스스로 들려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서는 모험가가 이해할 수 없는 숭고함이 느껴졌다. 그 말갛고 강한 숭고함에는 확신이 있었다. 따라서 막연하게 모험가는 그가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후 세계를 위해 잠에서 깨어나 세계를 구하고는 잘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모험가는 그때, 붉은 눈을 가진 옛 제국의 후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사람으로 묻었다. 그라하 티아뿐만 아니라 그를 거쳐간 모든 동료들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잠깐이라도 혼자 남겨져 생각에 잠기는 순간에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고는 했기 때문이다.

노르브란트에 크리스탈 타워가 어떻게 생겨났고 크리스타리움이 어떤 역사를 가진 도시인지 후드를 눌러 쓴 그에게서 들을 때만 해도 그게 가능했던 옛 동료가 있었지, 라고 잠시 생각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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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좋은 추억이 있었지. 그 짧은 20여년 중에서도 정말 짧았던 몇개월정도일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조직을 만들고 학문을 탐구하며 궁금한 게 해결될때까지 세계 이곳저곳을 쏘다니기도 했던 일은. 노아와 크리스탈 타워. 그보다 더 짧았던 영웅과 어둠의 세계. 그가 제1세계에서 보낸 세월과 비교하면 한순간과도 같았다. 이상한 일이지. 몸의 수정이 많아질수록 점점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지는데 마음까지 인간에서 멀어질 수는 없는 걸까. 그런 고민 자체가 너무나 인간적이라 짧게 웃었다.

도시를 세우던 초반의 수정공은 원초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사귀었다. 그들은 늙어죽어갔다. 수정공은 친애하는 이들의 죽음 자체가 슬프기도 했지만 그들과 자신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걸 다시금 느끼게돼서 더욱 외로워졌다. 그래서 몇십 번째인지 모를 누군가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는 스스로 이곳 사람들과 조금 거리를 두자고 생각했다. 수정공이 그 장례식의 주인을 '누군가' 정도로 기억하는 이유도 그의 결심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