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이상해. 안 취하잖아."

 

"너 도수라는 건 알아?"

 

"그게 뭔데?"

 

"얼씨구…."

 

"취하면 원래 짜증나는 생각들 싹 잊는 거 아냐?"

 

"그걸로 스무 잔을 마셔도 안 그럴 걸."

 

“….”

 

“무슨 생각을 잊고 싶은데?”

 

점원은 바 테이블에 앉은 모험가에게 저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당연한 거 아냐? 맥주만 주구장창 시켰는데 취하기를 바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혼잣말에 대꾸해버린 것이다. 분위기와 차림새를 보면 어린 나이임에도 모험 경력은 꽤나 있는 것 같은데 어쩐지 주점에 자주 오는 타입은 아닌 듯 싶다. 괴로운 표정으로 연신 맥주나 들이키는 꼴을 보면 안다. 취하겠냐고. 그럼에도 오래 앉아 꽤 여러 잔을 마시다보니 취기가 조금 올라오기는 했다. 그걸 하네. 자기가 취한 줄도 모르는 점이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점원은 그가 기대어 놓은 무기를 흘끗 본다. 대검을 쓰는 모험가들은 종종 보이지만 이렇게 무식하고 무지하게 큰 건 처음 본다. 게다가 그 대검의 주인은 휴런인 점원의 기준으로도 작은 체격에 속하는 미코테 종족인 모험가.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상식을 거스를 정도로 강한 모험가임이 틀림 없다.

 

모험가 쪽에서도 점원을 분석한다. 꽤 실력 있는 모험가. 그 정도로만 생각하는 건가. 하긴 빛의 전사는 소문이 무성하긴 하나 직접 보거나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 들은 적이 없다면 그저 대면하기만해서는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각국의 수장들과 친밀히 지내며 어떤 때에는 남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등 다소 정치적인 선전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초상화나 삽화같은 기록을 구태여 남긴 적도 없으니. 외진 동네라면 그럴 법도 하다.

 

…라는 추론과 본인은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긴장이 슬쩍 풀릴 정도의 취기가 그를 무르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 혹시라도 듣게 될 다른 이는 없다. 이 점원은 손님도 없고 일이 없어 말동무나 하자고 묻는 것이다. 눈 앞의 이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건 그냥 일기장과 다름 없다.

 

-

 

“…그래서 걔한테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제 다시 얼굴 봐야 하니까. 아니, 다시 보는 건 좋아. 그 일도….”

 

잠시 멈춘다. 울티마 툴레에서 그가 두 번째로 자신을 버렸던 기억을 꺼낸다. 울적해졌다. 그게 옳은 선택이었음을 안다. 그래도 속상한 건 속상한 거다. 그에게 티를 낸 적은 없지만.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었지만.

 

“…그 일도 잘 해결 됐고.”

 

당신이 여기에서 멀쩡하게 장사를 하고 있는 이유도 내가 그 일을 해결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가 거친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눈 밑이 한층 더 꺼슬해졌다. 그는 진심으로 착잡해보였다. …그렇게나? 불혹을 넘긴 점원은 놀랐다. 하긴, 이 나이대 애들은 별별 거에 우울해하거나 쪽팔려하기는 한다. 아무리 강한 모험가라도 비슷하구나.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이질적인 존재로 보였던 모험가가 조금은 인간적으로 보였다.

 

“일부러 나를 피해주는 게 보여. 배려받고 있다고. 내가 그 난리를 쳤는데도 배려를 해준다고, 걔는….”

 

“좋은 사람이네.”

 

“그치. 좋은 사람이고 멋진 사람이지.”

 

“그래, 그래.”

 

“더 신경쓰이는 건...”

 

다른 동료들이 같이 어딜 좀 가자고 했거든. 그니까… 나한테 들어온 의뢰지. 얘도 엄청 가고 싶어 했는데 바빠서 못 가. 속해있는 기관이 있는데, 거기 일이 너무 바쁘대. 돈도 모자라대. 장비도 겨우 빌렸댔나…. 그런데….

 

음의 고저가 없다. 평소에 말이 없는 타입이군. 점원은 잠시 상대를 평가하는 사회인의 무례한 눈길을 주었으나 가방을 뒤지는 데 정신이 팔린 통에 모험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가방을 뒤적일 때마다 그 사이로 구겨진 냅킨, 장착했다 떼어낸 흔적이 있는 마테리아 등이 굴러다녔다. 그것은 구형 디자인으로 최근에는 그렇게 순도가 낮고 가공이 거의 되지 않은 마테리아는 풋내기 모험가들도 사용하지 않는다. ...저 마테리아는 얼마나 오래 들고 다닌 거지? 바 테이블에 기대어 있는 무식한 크기의 대검과 그 잡동사니들을 번갈아보았다. 그 즈음 모험가는 곧 깨끗하게 접힌 지류를 꺼내들었다. 아마도 그의 가방에 들어있는 것 중 가장 최신일 것으로 추측되는….

 

“도착지에서 쓰라고 지도를 사줬어. 나는 도망치는 건데.”

 

“너, 쓰레기네.”

 

“반박의 여지도 없어. 맞아.”

 

하고는 맥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지도를 곱게 다시 접어 가방에 넣었다. 그 조심스러운 행동과 반대로 그는 주머니를 부산스럽게 뒤져 동화를 찾아 꺼냈다. (지갑이 없는 건가? 설마.) 미지근해. 맛 없어. 새 거 꺼내 줘. 점원이 답했다. 네, 네. 그렇게 합죠.

 

-

 

호기심, 심심함, 약간의 불순함으로 모험가에게 말을 걸긴 했으나 점원은 고민을 듣고 곧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나 프라이빗한 걸 들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조카 뻘 사내의 연애 고민이라니… 재미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진짜로 도망치는 거 맞아? 그 친구를 안 보기만 할 거면 집에 틀어박혀도 되잖아.”

 

“집에는 데려온 적 있는 걸.”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알잖아. 아니, 이 사람이, 할 건 다해놓고 이러네. 집에도 데려갔으면, 뭐….”

 

“그런 거 아냐.”

 

“생각해 봐. 진짜로 도망치는 거야? 그 친구 안 보려고?”

 

“아니, 보고싶을 거야.”

 

술 마신 사람 특유의 대화가 이어지는 듯 이어지지 않는 듯 뱅뱅 도는 상태가 계속됐다.

 

“그럼 안 가면 되잖아.”

 

“나는... 모험가니까.”

 

그에 점원이 눈을 크게 떴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 또 그 소리. 내가 20년은 들어온 그 소리. 그래, 그곳에 산이 있기에 오르는 거지, 당신네들은.”

 

“산이 있어서 오른다….역시 지금은 그럴지도 몰라. 그 애 때문에 세상이 좋아졌거든. 그 애 때문에 가는 거야. 그 애가 산이 좋다고 하면 산을 오를 거야.”

 

모험가는 한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물론 취기와 분위기 탓도 어느 정도 있었을테지만 그렇다고 아예 마음에 없는 말을 이렇게나 담백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점원은 입을 떠억 벌렸다. 너무나 날것의 간지러운 사랑 표현이었다. 이걸 듣고 흔들리지 않을 애들은 없다. 적어도 이 녀석 또래 정도면.

 

“야, 너 그거 가서 말하기만 해. 너처럼 마르고 얼굴은 허여멀건 애들, 니네 그런 애들 좋아잖아. 네가 빠질 게 뭐 있어? 어? 와꾸는 합격이야. 그냥, 가서 말을 해.”

 

“그 애는 특별해. 취향도 모를 뿐더러 외적인 걸로는 점수 따기 어려워.”

 

“그래봤자 니 또래 아냐?”

 

“음….”

 

아무래도 삼백 살 정도 살아서. 라고 말을 할 수는 없겠지…. 공식적으로는 백 살이던가. …왜 이렇게 오래 살아버린거지? 상대가 전혀 안 되잖아. 그런 강하고 단단한 면모에 반한 건 맞다. 그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안다. 표면적으로는 그게 자신을 위해서라는 사실도.

 

“…아무튼,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모험가는 손을 휘휘 저었다. 이제 할 말은 다 했다는 뜻이다. 점원은 어깨를 으쓱한 후 조금 거리를 둔 채 테이블 안쪽에서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험가는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그런 채로 살기로 했다. 여전히 평범함과 거리가 먼 자신에 대해 모른다. 이제는 애초에 정답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이전에 느꼈던 절망감과 달리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꼭 찾아야 하나? 정답이 없을 수도 있잖아. 그런 의미에서 그의 모험은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그라하 티아라는 새로운 목적이 찾아왔다.

 

이제 그에게는 찾고싶은 정답이 생겼다. 그와 나 사이에 정답이 없는 건 싫어. 정답을 찾고 싶어. 그러니 오답일 확률이 높은 지금의 상황에서 섣불리 답지를 넘겨 보고싶지 않아. 그만큼 그를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고 내 옆에 두고싶었다. 그러나 나 때문에 우리는 불확실한 관계를 이어가며 나는 스스로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모순이다. 얼간이가 따로 없다…….

 

콰앙. 둔탁한 소리에 점원이 고개를 들자 반대로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은 모험가가 있었다. 이런, 이렇게 취해서 자빠진 사람이면 강하고 뭐고 소용도 없겠는데. 이를 어쩐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마저 가게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시간이 몇십 분 정도 지났을까, 대문에 걸린 낡은 풍경이 달랑거리며 쇳덩이끼리 긁히는 소리를 냈다.

 

“실례합니다.”

 

붉은 머리의, 소년과 청년 사이의 나이로 보이는 사내가 들어왔다. 곧 귀를 쫑긋거리며 두리번거리더니 바 테이블에 처박힌 검은 머리통을 발견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럴 녀석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원망보다는 걱정하는 모양새다. 거 어떻게 알고 왔어? 점원이 물으니 붉은 머리의 사내가 답한다.

 

“우리는 동료인데, 무슨 일이 생길까 행선지를 꼭 적어놓고 외출하는 규칙이 있거든. 링크펄이 안 될 수도 있으니까. 필체는 따라하기도 어렵고.”

 

그 어른스럽고 의젓한 느낌에서 점원은 감이 왔다. 아, 이 모험가. 너무 애새끼잖아. 본인 짝사랑 상대한테 행선지를 그대로 적어놓고 왔다고? 너 걔 때문에 술 마시러 온 거잖아, 미친 놈아. 역시 강한 모험가와 노련한 모험가, 인간관계에 능숙한 모험가는 다른 게 맞구나. 그는 그냥 무식하게 엄청 강하기만 하고 나머지는 보통 이하, 꽝인 모험가다.

 

“그냥 버리고 가지?”

 

“이 녀석 뭔가 실수했어? 그럴 사람이 아닌….”

 

“나보다는 그쪽에게.”

 

“…?”

 

붉은 머리의 사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테이블에 처박힌 사내를 부축했다. 어어, 들 수 있어? 저걸 들겠다고? 점원이 턱으로 기대어 놓인 시커먼 대검을 가리켰다.

 

“들 수 있지. 내가 드는 건 아니지만….”

 

그는 작게 주문을 외우더니 대검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곧 자세를 고쳐잡고 좀 더 편하게 술에 푹 절은 모험가를 부축했다. 이쪽에도 마법이 적용된 모양이다.

 

“그럼, 수고해. 아, 참. 계산은?”

 

“이미 했어. 그냥 가면 돼.”

 

“그래. 이만 실례할게.”

 

낡은 풍경이 다시 달랑였다. 자박자박 발 소리가 멀어진다. 잠깐이지만 모험가의 꽤 깊은 속내까지 들어 본 소감으로는… 내일 아침에도 얼굴을 벅벅 문지르지 않을까. 붉은 머리의 사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음 쓰이는 일이 있는지 묻고 그를 돌보기 위해 침대 맡을 지키고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머리가 검은 쪽은 아주 오래 자는 척을 할 것 같고. 웃기긴 하다.

 

매출을 위해서라면 그가 좀 더 고통받는 쪽이어야 하는데. 그래도 그건 너무 나쁜 생각이지. 그러니 기왕이면 둘이 함께 방문해주면 좋겠네. 매출도 두명 분이고 그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도 진짜 웃길 것 같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점원은 마지막 남은 잔의 물기를 닦아냈다.